
종이 몇 차례 울렸다. 마치 시간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건반 위를 미끄러지던 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백발의 숙모는 마지막 화음을 공중에 잠시 매달아 둔채, 고개를 들어 테리를 보았다. 눈빛은 담담했지만 그 안의 정확한 감정은 알 수 없었다.
“다섯 시구나. 이제 가야지?”
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숙모는 피아노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했다. 오래된 나무가 삐걱이듯 동작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운 힘이 실렸다. 테리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도왔다. 스카프를 숙모의 어깨에 둘러주자 숙모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구나. 고마워. 이건 내가 결혼할 때 썼던 거란다.”
테리는 그 스카프를 바라보았다. 빛이 스며든 꽃잎 무늬가 먼 시간을 통과해 여기까지 흘러온 것처럼 보였다.
“아름다워요.”
숙모는 천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손가락은 얇았지만, 기억은 또렷해 보였다.
“자, 이제 가보렴.”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이 꽃잎 무늬는 말이지, 폴리네시아 공주의 손을 상징한다고들 한단다. 62년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모양이 남아 있구나. 나도 그랬다면 좋았을텐데…”
말끝이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이크가 한 발 다가왔다. 사랑과 존경을 담은 눈빛으로 숙모에게 말했다.
“곧 다시 뵐게요.”
방 안에는 아직 조금 전 멈춘 피아노의 잔향이 아쉬움처럼 남아 있었다.
영화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엔니오 모리코네’는 익숙한 이름이다. 오늘 소개할 OST는 <시네마 천국>처럼 대중적으로 폭발한 곡은 아니지만 애호가들 사이에서 숨은 멜로디 명곡으로 분류되는 경우의 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관심이 많지 않은 이들도 한 번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멜로디의 피아노 솔로이다.
1994년, 글렌 고든 캐런 감독이 만든 영화 <러브 어페어>는 사랑을 운명에 맡기는 실험으로 해석되는 영화이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 진정성을 검증하려는 선택을 다룬다고 볼 수 있다.
마이크 갬브릴(워렌 비티 분)은 한때 풋볼 쿼터벡이었다. 지금은 유명 스포츠 캐스터다. 화려한 이력만큼 사생활도 늘 화제다. 그는 방송계의 거물 린 위버(케이트 캡쇼 분)와의 약혼을 발표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호주행 비행기 안에서 그는 한 여인을 만난다. 테리 맥케이(아네트 베닝 분). 낯설지만 묘하게 마음이 끌린다. 짧은 대화가 이어지고, 공기는 조금 달라진다. 비행기는 갑작스러운 엔진 고장으로 작은 섬에 비상착륙한다. 우연처럼 시작된 만남은 예상치 못한 시간 속에서 조금 더 깊어진다. 두 사람은 러시안 여객선을 타고 타히티로 향한다. 그 사이, 감정은 분명해진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약속을 남긴다. 3개월 후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 전망대에서 다시 만나기로.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을 둔다. 혹시 나오지 않더라도 이유는 묻지 않기로.
이야기는 거창하지 않다. 우연한 만남과 선택의 순간. 그리고 약속. 하지만 그 단순한 설정이 이 영화의 감정을 오래 붙잡아 둔다.

<러브 어페어>의 OST ‘Piano Solo’는 모리코네의 작곡 철학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곡이다.
멜로디는 단순해야 하지만, 감정은 단순하지 않아야 한다.
로맨틱 영화에서는 감정을 과장하기보다 인물의 내면을 대신 말하는 음악을 지향한다는 그는 오케스트라 스타일과 달리 상대적으로 절제되고 고전적 선율 중심의 작곡을 선택한다. 그런 측면에서 ‘Piano Solo’는 감정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감정을 응축한 상태를 표현한 트랙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인공 테리의 허밍이 함께한 버전이 그렇다.
피아노가 먼저 흐른다. 느리다. 복잡하지 않다. 몇 개의 음이 반복될 뿐이다. 그런데 그 반복이 감정을 쌓는다. 그 위에 허밍이 얹힌다. 가사는 없다. 대신 숨결이 있다. 그래서 솔직하게 느껴진다.
이 곡은 엔니오 모리코네가 이 영화를 위해 만든 테마다. 단순한게 최고라고 했던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좋은 영화 음악은 장면을 방해하지 않고 장면을 완성한다. 이 곡이 그렇다.
사랑이 시작되기 전의 망설임, 그리고 지나간 뒤의 여운. 이 곡은 그 사이에 머문다. 과장하지 않아서 더 진짜처럼 들린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장면보다 먼저 이 선율이 떠오른다. 정확하게는 분위기가 떠오른다. 의도가 무엇이든 그것으로 충분하다.
필자의 경우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한국은 1995년)에는 이 영화의 존재를 몰랐다. 어린 시절 TV에서 방송 화면조정 시간이라고 방송과 방송 사이에 광고가 없을 때 배경음악이 흘러나왔는데 그 때 처음 이 곡을 접했다. 이 후에는 결혼식이나 추모식 같은 곳에서 재생되는 것을 경험했다.

격정적인 로맨스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약속을 다룬 이 영화에서 감정을 밀어 붙이지 않고 장면을 설명하지 않으며 인물의 마음을 대신 말하는 음악. 엔니오 모리코네의 테마 중 비교적 덜 소비된, 대표작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 매력적인 OST. 오래 남는 로맨스를 찾는 사람에게 추천한다.